참찬공 휘 계양(啓陽)
사효재-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공의 자(字)는 계신(季信)이요 일휘는 돈지(敦之 ) 초명은 계양(啓陽)이다. 고려 삼중대광 보문각 대제학 (高麗 三重大匡, 寶文閣 大提學) 휘 윤문(允文)의 자(子) 육형제중 5남으로 1342년 1월 6일(충혜왕4) 송도(개성) 건천리 본가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1360년(공민왕10)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이해 10월 25일에 책문으로서 신경동당(新京東堂) 병과(丙科) 5인에 급제하였다. 이 때 공(公)의 나이 19세이다.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이 날 을과(乙科) 3인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24세였고. 목화씨로 유명한 고려 충신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도 병과(丙科)7인에 같이 급제하였는데 나이는 30세였다.1362년 5월 문예부승(文睿府丞)을 제배(除拜)하고 이듬해 5월 승봉랑(承奉郞), 전의주부(典儀主簿), 고공좌랑(考功佐郞), 예의좌랑(禮儀佐郞)으로 옮겼는데 한 결 같이 사람의 도량과 재능의 이룸을 보였다.
임금이 현용청(現用廳)을 설치하고저 할 때 적색소경[政色小卿,무신 정권 때 정방(政房)에 ]둔 정색승선(政色承宣) 중 사품 이하의 관원)]에 명하였고, 1365년(乙巳) 7월 군부좌랑(軍簿左郞), 1366년 12월 예문응교(藝文應敎) 지제교(知製敎), 1367 12월 군부정랑(軍簿正郞), 예문지제교(藝文知製敎), 무신(戊申)12월에 봉선대부(奉善大夫) 내서사인(內書舍人) 지제교(知製敎), 기유(己酉)12월에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승진했는데 다른 직책은 전과 같았다. 홍무(洪武)신해(辛亥) 12월에 비서감(秘書監)으로 승진하니 품계는 중정대부(中正大夫)였다.임금의 귀염을 받던 홍윤(洪倫)이 원수진 사람으로부터 많은 재물을 받아서 임금의 측근들에 차차 젖어들게 하여 公으로서는 닦을 수 없는 명예(名譽)라 산과 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홍륜이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후 밝게 설원(雪寃)되었다.
무진(戊辰)(1388) 겨울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사신(使臣)이 되어 경사(京師-명나라 서울)에 가면서 공을 압물관(押物官)으로 삼아서 경사에 갔는데 관소(館所)에 대우가 특별하고 온전했다. 국초(國初)에 왜구(倭寇)가 아직까지 날뛰어 바닷가를 노략질 하므로 태조(太祖)께서 일본에 공을 통신사(通信使)를 보냈다. 일본의 대장군(大將軍)과 대내전(大內殿)이 공의 풍체가 잘생긴 것을 보고는 공의 말을 간절하게 들으면서 매우 존경을 표했다. 대내전이 대장군에게 호령을 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왜구를 토벌하라고 청하여 오백 여명을 참수(斬首)하기에 이르렀다. 건문(建文) 기묘(己卯, 1399년) 5월초5일에 복명(復命)하니 인덕전(仁德殿-왕)께서 매우 기뻐하여 공(公)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전중(判殿中)으로 발탁하니 특별한 대우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발호(跋扈)하는 일이 없어 연해(沿海)에 백성들이 전처럼 안도(安堵)하며 살 수 있었다.1399년 2월에 판봉상(判奉常) 보문각직제사(寶文閣直提事), 이듬해 7월에는 가정대부(嘉靖大夫)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보문각학사 겸 판전의사사(寶文閣學士兼判典醫寺使), 1402년 4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상서(刑曹尙書) 5월에는 승추부(承樞府)에 들어가 가정대부 제학 겸 판군자감사(提學兼判軍資監事)가 되었다.
9월에 공안부윤(恭安府尹) 수문전제학 겸 판군자감사(修文殿提學兼判軍資監事), 9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1411년(辛卯,태종11) 8월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내고 1422년(영락 壬寅)에 졸하였다.
공(公)의 효성과 충신(忠信)은 천성에서 나와 어버이를 봉양하고 여묘(廬墓)를 살면서 상제(禮制)를 극진히 마쳐 효행으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공의 묘소는 아버지 대제학공 아래 모셔져 있고 6형제중 유일하게 유택이 보존되어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에 사효재(思孝齋)가 있어 후손들이 모여 종사를 논의한다. (享 음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