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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 : 충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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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박씨 충헌공파 


경모재 전경(경남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⓵충헌공을 비롯한 아드님 손자 3세조 제단. ⓶경모재 본당, ⓷ 청년회 사무실. ⓸ 충헌공의 증손 대제학공 윤문 이하 묘역 

 

밀성 박씨 중조(中祖: 충헌공 휘 척), 단비(壇碑)를 비롯하여 2세 휘 성진(成進: 高麗精勇將軍), 3세 휘 원(原,元: 高麗 判田校寺事)의 세분의 단(壇)을 모셨고 4세 휘 윤문[允文] 字는 質夫이며 밀성군 척[陟]의 증손이다. 고려조때 ( 高麗 三重大匡, 寶文閣 大提學, ] 일품 [一品]최고직에 계셨으며 유교 문화를 고려에 앞장서 받아들이고 시행하신 분이다. 고려 충숙왕 7년[서기1338년] 8월에 밀성군의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당시 벼슬이 지평 이셨던 공께서는 시묘살이 3년을 하시어 감탄할 만한 효행이 새롭게 일어났다. 그리고 공의 문학적인 재질과 학문의 폭에 대하여 많은 기록이 목은[牧隱]이색[李穡]의 아버지 가정[稼亭]이곡[李穀]선생의 가정집 [稼亭集] 권9[卷9]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유교문화을 최초로 도입하신 안향[安珦]의 손자 안목[安牧]선생과는 동서[同壻]지간으로서 당시 갑족[甲族]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숙공(文淑公) 안목 [安牧]선생은 쾌헌 문정공 광산 김태현 [光山 金台鉉]의 큰 사위이고  박윤문 께서는 둘째 사위 이시다. 밀성군 박윤문(朴允文) 묘소는 밀양시 하남읍 귀명동 구봉산 남향 하단이며 그 하단에 공의 5남 참찬공 휘 계양(啓陽)의 묘소가 있고, 하단 우측에는 정언공 휘 삼양(三陽)의 단비가 있으며  묘하에 경모재란 재호하에 본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충헌공파(忠憲公派) 淵源


경모재 후원(後園)에 마련된 충헌공을 비롯한 3세조 제향광경(음10.3)

충헌공은 密城大君의 13世支孫(시조 42世孫)으로 상계를 보면 밀성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9世孫) 太師公 휘 언부(彦孚)는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하였으며 밀성부원군으로 피봉 되었다.

태사공께서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는 효신(孝臣) 차는 의신(義臣)이다. 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이다. 고려주석(高麗柱石)이라 부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필 넉자를 하사 했다. 유지는 경북 청도군 풍각 화산에 있다고 하나 확증이 없다. 태사공의 둘째아들 諱 의신(義臣)은 당대의 文章家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내셨다.

의신의 장자 원(元)은 사문진사공파 파조이고 차자 윤(允)은 호연(浩然), 효연(皛然)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호연(浩然)의 현손 중미(中美)는 밀직부원군파조, 차자 효연(皛然)은 충헌공의 조부가 된다.

부친의 휘(諱)는 지영(之塋)이며 고려 고종조에 정시 갑과에 합격하였으나 뜻이 청고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해동시선(海東詩仙)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모친은 영양이씨(永陽李氏)이다.

휘는 척(陟)으로 고려조에 내부시승(內附侍丞)에 이르고 순충동덕찬화공신 삼중대광(純忠同德贊化功臣 三重大匡)에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해졌으며, 추은(推恩)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은총이 더하여지고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다.

사패지(賜牌旨)를 하사받으니 옛 밀주(密州) 수산현(守山縣 : 현 밀양시하남읍)에 있으며 자손이 세세로 계승하여 녹을 받아 왔다. 충선왕(忠宣王)이 태자일 때 정가신 ․ 민지 등과 함께 원(元)나라에 가서 삼년을 지낼제 공(公)도 함께 수행하여 김심과 더불어 심양(瀋陽)에서 높이 뫼시는데 힘쓰고 충선왕을 모시고 돌아와서 즉위하였으나 왕유소와 송방용이 정사를 마음대로 전횡하므로 공(公)이 의논하여 이들을 주살하니 이에 비로소 충선이 국정을 전담하게 되어 조야가 서로 가까워지고 태평하게 되었다.


충헌공파 세계(世系)


경모재 뒤 선영 묘원(⓵ 대제학공 휘 윤문 묘소, ⓶대제학공의 4남 정언공 제단, ⓷ 5남 참찬공 묘소)
 

충헌공은 부인 아림군부인(鵝林君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사이에 아들 성진(成進)을 낳으니 문과에 올라 조현대부(朝顯大夫)로 흥위위(興威衛) 정용장군(精勇將軍)에 협찬공신(協贊功臣)으로 황증문하평리(皇贈門下評理 종2품)에 이르렀다. 특히 고려 충렬왕 6년 군사 25,000명을 거느리고 왜적을 정벌 한 일은 고려사와 밀주구지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손자 판전교시사의 휘는 원(原)으로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벼슬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고 규의선력공신(揆儀宣力功臣)으로 밀성군에 봉해지고, 슬하에 아들 윤겸(允謙), 윤문(允文), 윤무(允武)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 윤겸(允謙)은 중랑장(中郞將)으로 아들(휘 連), 손자(휘 강)에 이르러 무후(无后)이고 차남 휘 윤문(允文)은 밀주의 풍각화산(현 청도군 풍각면 화산) 본가에서 출생하여 충숙왕 원년(1314년)에 급제하여 삼중대광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충목왕 원년(1345년) 문사(文士) 38명을 선발하여 날짜를 바꾸어가며 시독(侍讀) 할 때 공(公)은 기거랑(起居郞, 中書門下省에 속한 관직의 하나. 임금의 일상생활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등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보는 종5품의 관료)으로서 주참(注叅)하여 저술(著述)하였고, 특히 문장이 뛰어나 저술(著述)한 문적(文籍)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렸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부인 해양군부인 광산김씨는 첨의정승으로 치사(致仕)하고 시호(諡號)가 문정(文正)인 태현(台鉉)의 따님이다. 부도를 수행하고 시부모(媤父母)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효(友孝)하고 자손을 골고루 화애(和愛)하고 자비심(慈悲心)이 노비(奴婢)에 까지 이르고 의복(衣服), 음식(飮食)에까지 두루 돌아가게 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니 대광공(大匡) 公은 호례군자(好禮君子)이고 부인(夫人) 또한 예절(禮節)의 여자교훈(女子敎訓)으로 칭송받았다. 슬하에 아들 6명을 두니 세칭 육남대가라 불러지며 크게 번성하였다.

삼남 윤무(允武)는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제학에 이르렀으나 이 또한 손자대에 이르러 세계(世系) 이어지지 않았다.
대제학공 윤문(允文)의 장남은 밀양(密陽)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고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로 밀산군(密山君)에 봉작(封爵)되고, 차남(次男)은 대양(大陽)으로 과거에 올라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삼중대광전법판서(三重大匡典法判書)로 익조공신(翊祚功臣)의 밀천군(密川君)으로 봉작(封爵)되고 3남(三男) 소양(昭陽)은 진사로서 지절(志節)이 크고 굳세어 성균관 진사(進士)시험 이후로는 영달을 멀리하고 학문을 탐구하며 중국천하(中國天下)를 장유(壯遊)하였고, 4남(四男)은 삼양(三陽)으로 과거에 올라 정언(正言)에 이르렀고, 오남(五男) 계양(啓陽)은 진사시험(進士試驗)에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동년에 급제하여 관직이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이고, 6남(六男) 재양(載陽)은 장사랑(將仕郞)으로 관직이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이르러 이들 6형제가 가문을 크게 번성시켰다.

 

 

 대제학공 휘 윤문 행장(大提學公 諱 允文 行狀) 

동방의 대가[大家]요 명문의 고귀한 족인[族人]으로 장상[將相]을 겸한 자질에 덕망이 우뚝 높이 웅장[雄壯]하고 명성에 위엄[威嚴]이 우렁차 공명을 새긴 고귀한 집안으로 역사에 길이 빛남이 기술[記述]된 시종결점[始終缺點]없는 가문이란 또한 세상에서 드믈 게 있음이니 지금 대광공밀성군[大匡公密城君]의 가문에서 볼 수 있도다.공의 성[姓]은 박[朴]씨요 휘는 윤문(允文)이오 자[字]는 질부[質夫]니 계출[系出]은 신라의 경명왕자인 밀성대군으로 그 세대를 이어옴이 멀고 멀도다.

 

그 후로 자손들이 불어나 본관[本貫]을 밀성[密城]으로 하였더라. 공의 증조 휘는 척[陟]이니 고려 충선왕조의 내부시승[內部侍丞]으로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에 봉작[封爵]되고 추은[推恩]으로 가상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시호를 충헌[忠憲]으로 추증하고 사패지[賜牌地]를 내려 봉사케 하고 공신의 자손으로 하여금 세세로 질녹[秩祿]을 수급[授給]하였다.

조[祖]의 휘는 성진[成進]이니 조현대부[祖顯大夫]에 흥위위[興威衛]에 정룡장군[精勇將軍]으로 황증문하평리[皇贈門下評理]이고 고[考]의 휘는 원[原]이니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에 규의선력공신[揆儀宣力功臣]으로 밀성군에 봉작[封爵]되고 황증문하찬성사[皇贈門下贊成事]이다. 비[妃 ]는 밀성군 부인 손씨[孫氏]이니 급제[及第]한 홍권[弘權]의 여[女]이다.

 

공[公] 휘 윤문(允文)은 밀주의 풍각화산 본가에서 출생하니 기개[氣槪]가 높고 절조[節操]가  굳고 우람한 위엄[威嚴]으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널리 달통하여 장차 크게 쓰임의 자질이 있어 충숙왕 원년에 급제에 올라 벼슬이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에 이르고 밀성군에 봉작되었다.

충목왕 원년에는 문사[文士] 38인을 선출[選拔]하여 날짜를 바꾸어가며 시독[侍讀]할 때 공은 기거랑[起居郞]주참[注참]하여 저술 하였다. 배[配]는 해양군부인 광산김씨[海陽郡夫人光山金氏]이니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致仕]하고 시호 문정공(文正公)인 김태현[金台鉉]의 여[女]이며 랑장[郞將]인 왕정조[王丁朝]의 외손녀이다. 

 

천성이 온숙[溫淑]하고 서사[書史]를 두루 거치고 나이 젊어서 박씨 가문에 시집가서 부도[婦道]를 수행하고 시부모[媤父母]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효[友孝]하고 자손들을 골고루 화애[和愛]하고 자비심이 노비[奴婢]까지 이르르고 의복음식[衣服飮食]까지 두루 돌아가게 하기를 법도[法道]에 맞게하니 대광공은 [大匡公]은 호예군자[好禮君子]이고 부인[夫人] 또한 예절의 여자 교훈[女子敎訓]이 되니 이것을 이르기를 가히 군자의 배필로 마땅함이니 복 받음이 면면[綿綿]이 이어져 자손이 많아 6남이 생장[生長]한 장남은 밀양[密陽]이니 과거[科擧]에  올라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고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로 밀산군[密山君]에 봉작[封爵]되고 차남[次男]은 대양[大陽]이니 과거에 올라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삼중대광전법판서[三重大匡典法判書]로 익조공신[翊祚功臣]의 밀천군[密川君]으로 봉작[封爵]되고 3남[三男]은 소양[昭陽]이니 진사로서 지절[志節]이 크고 굳세어 성균관 진사시험 이후로는 구지부례한 벼슬 따위를 마다하고 중국천하[中國天下]를 장유[壯遊]하였고 4남은[四男]은 삼양[三陽]이니 과거에 올라 정언[正言]으로 계림[鷄林] 고을로 출사하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고 오남[五男]은 계양[啓陽]이니 진사시험[進士試驗]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정포은[鄭圃隱]과 더불어 동년에 급제하여 관직이 문하부사비서감[門下府事秘書監]이고 6남은[六男]은 재양이니 장사랑[將仕郞]으로 관직이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이르니세상에서 칭 하기를 육남대가라 이르렀다. 남녀 손자들이 불어나 번성[繁盛]하여 모두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목은 이색[牧隱李穡] 4자의 등과를 축하하여 이르기를 형제연중[兄弟聯中]이라 함은 지금 세상이 다같이 알고 있는 바는 밀성박씨에 왈 密陽. 왈 大陽. 왈 三陽. 왈 啓陽 이라 일컬었다.

 

공의 부인은 四자등과로서 해마다 나라의 봉록을 받으니 당세의 모든 현인들이 그 복[福]됨을 칭송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공이 지평[持平]으로서 부모[父母]상[喪]을 당하여 복주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할 때 예절로 행함이 감[堪]히 근신하니 한 시대의 고관 선비들이 그 효성을 칭송하지 않음이 없었다. 38인의 이름높은 선비중에서 목은[牧隱]과 더불어 도의를 사귀었다.

 

공의 사람됨을 성품이 강직함과 온순함을 겸비하여 의젓하고 엄숙한 가운데도 화평[和平]의 자질이 있으니 바라봄에는 엄숙한 모양이나 직접 대하면 온화하다. 그 가정에 있을 때는 작은일에 개의치 아니하고 그 가정에 있을 때는 경세제민[經世齊民]을 자기의 임무로하니 주역[周易]에서 이르는 바 왕신으로 충성을 다 하는 모양은 가히 절조[節操]에 부합된다고 이르리라.

공은 1298년 무술[戊戌]에 출생하여 1372년 임자[壬子] 8월 20일에 별세하니 수산현 귀명동에 장례를 치렀다.

슬프도다 공은 나의 선군정당문학공[先君政堂文學公]과 더불어 김 문정공과 같은 사위로 들었고 공의 부인과 나의 선비[先비]와 더불어 동모형제[同母兄弟]이니라. 공의 충효도의[忠孝道義]에 내가 일찍 감화[感化]된지 오래 되었는지라 공의 가문에 성대함과 위[位]가 인신의 의리에 지극[至極]함에 있음을 약술[略述]하여 여기에 덕행의 기국[器局]이 있음을 이르노라.

             

안원숭[安元崇][順興君文惠公]근찬[謹撰].



 

 해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海陽郡夫人 金氏 墓誌銘 幷序)

(이 명[銘]은 서[序]와 함께 후손[後孫]인 박필의[朴必義]집에서 나왔다 대체 필의가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광산김씨의 묘소를 찾아 진짜이니 확인하려고 묘[墓]를 파서 이 묘지명[墓誌銘]을 얻은것이다.)

대광(大匡) 밀성군 박공(密城君 朴公)의 부인 김씨는 광주(光州)사람이다. 옛날 사공(司空) 김길(金吉)이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 몇 대 뒤 후손인 대장군 경량(鏡亮)은 부인의 증조가 된다. 문하시중 수(須)를 낳았고, 시중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은퇴한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4남 2녀를 두었다. 부인이 가장 막내이다. 선부의랑(選部議郞) 광식(光軾)은 이복 오빠이고,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과 문간공(文簡公) 광재(光載),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목(安牧)의 부인, 급제한 광락(光輅)은 모두 친형제이다. 외할아버지는 낭장 왕정조(王丁朝)효은태자(孝隱太子)의 후손이다.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따뜻하고 맑으며 더하여 어진 아버지와 형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나이 약간에 박씨에게 시집와 부인의 행실을 닦으니 세족(世族)의 귀함에도 불구하고 실오라기만큼의 거만한 빛이 없었다. (남편인) 대광공 또한 예절을 좋아하는 군자로서 평상시에도 서로 공경하여 손님을 대하듯 했다. 부인은 평생 부모를 효도로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자손을 고르게 사랑하고 노비와 하인에게 은혜롭게 하였다. 밤에는 불경을 읽고 낮에는 베를 짰는데 나이가 들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의복과 음식은 또 반드시 풍요함과 검소함의 중도에 맞게 하였다.

어머니 왕씨(王氏)는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군대부인(郡大夫人)에 봉해져, 해마다 녹을 받았다. 부인도 네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왕씨와 같은 은택을 받았고 녹은 더 많았다. 하루는 서로 ‘우리 한 집안에 두 부인은 나라에 보탬도 없으면서 두터운 은혜를 입으니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부인의) 마음 씀씀이가 이와 같았다.

아들이 다섯이다. 큰아들 밀양(密陽)은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이다. 둘째 대양(大陽)은 봉익대부 전법판서 보문각제학 상호군이고(奉翊大夫 典法判書 寶文閣提學 上護軍)이다. 셋째 소양(紹陽)은 성균시를 본 후 (원나라) 수도에 갔다가 운남(雲南)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넷째 삼양(三陽)은 정언(正言)이었다. 언사(言事)로 계림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공무로 죽었다. 다섯째 계양(啓陽)은 중정대부 비서감(中正大夫 秘書監)이다. 죄가 아닌 것으로 폐인이 되니 세상 논의가 안타깝게 여겼다. 손자는 남녀 10여 명이다. 밀양은 장경공 유돈(將敬公 柳敦)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인 낭장 경무(敬茂)와 판사재(判司宰) 경인(敬仁)과 네 딸을 낳았다. 별장 구희(具禧)와 중낭장 박침(朴忱), 청주판관(淸州判官) 장연(張縯)이 그 사위이다. 막내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대양은 익산군(益山君) 홍운수(洪云遂)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고, 첩(外室)에게서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좌우위 녹사참군이다(左右衛 錄事參軍)이다. 계양은 전주목사 홍만용(洪萬龍)의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증손은 남녀 내외로 합하여 10여 명이다. 아아, 부인의 덕행이 그와 같고 자손의 많고 귀하게 현달함이 이와 같으니 ‘이러한 덕이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복을 누린다’는 것이 옳도다.

부인은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 1361) 대광공과 함께 밀성(密城)으로 난리를 피하였다가 그곳에 살았다. 나이 73세인 홍무(洪武) 갑인년(공민왕 23, 1374) 8월 기해일에 돌아가셨다. 그 달 신축일에 수산현(守山縣) 구명산(九明山)에 장사지냈다. (부인의) 막내아들(계양)이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지금 피눈물을 흘리며 시묘 살이 하면서 나에게 편지와 가장(家狀)을 보내며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부인을) 위하여 묘지명을 짓는다.

 

명(銘)에 이르기를, 대대로 내려오는 세가에 나 아름다운 덕이 뛰어났고 위의를 삼가 예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군자에게 시집가 훌륭한 자식 집에 가득하니 어머니는 아들로 귀하여져 봉작과 녹으로 영화롭다.
나이 일흔셋 호상(好喪)이라 하겠는데 슬퍼하는 저 상주 묘 곁에서 피눈물 흘리네.

 

전 봉순대부 성균대사성 지제교 충 춘추관 수찬관 정몽주 가 지었다.

 

("묘 () () () 1 , 1374( 23) .

( : 1302~137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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