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공 휘 소양(昭陽)
문장이 매우 뛰어나고 성정이 기개가 넘쳤다.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고려 말의 정치적인 혼란을 보고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들어가 산남염방사([山南廉訪司)의 직책을 얻어 경사를 왕래 하였다.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벼슬하지 말라 하고는 고려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서 돌아가시자 남긴 옷과 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어머니는 고려 시중인 문정공 김태현(金台鉉)의 따님인데 지체가 높고 법도가 한 시대의 으뜸이 된 명문이라 김씨가 생장할 때 익혀 배운 습성으로 아들을 훈계하는 방도를 세웠으니 하물며 대광공의 엄격 함 에서이다. 해양군부인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부인 진천송씨는 홍무 갑인(洪武 甲寅, 1374)가을에 돌아가셨으니 곧 공의 상복입기를 끝낸 후 연월일은 알 수 없으나 중국에 들어가 벼슬을 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이 일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집(輯)에 보인다. 향사일은 경모재 향사 다음첫 일요일이다. 밀양시 단장면 사연리에 진모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