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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왕

-일성왕기(逸聖王己 AD134∼154) -


 

일성왕은 유리왕의 장자이시니 처음에는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이라 하였다. 왕위에 계신지 20년이며 壽는 111세요 陵은 국도 남쪽 해목령(蟹目嶺) 아래 장전동 卯坐이다. 妃는 석씨이니 능은 금서문 밖 子坐이다. 계비(繼妃)는 허씨(許氏)요 능은?
■ 원년 乙亥에 석(昔)씨를 왕비로 봉하다.
■ 2년 丙子에 웅선(雄宣)으로 이손(二飡)을 삼고 겸하여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를 맡게하다.
■ 3년 丁丑 봄에 말갈(靺鞨)이 침입하여 장령(長嶺)의 다섯 성책을 불태우거늘 곧 성책을 세워서 침입을 방지하다.
■ 4년 戊寅에 정사당(正事堂)을 금성에 세우고 북방을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하다.
■ 5년 己卯가을에 말갈(靺鞨)이 장령을 습격하여 백성을 약탈하거늘 장령에 성책을 세워서 방지하다.
■ 9년 甲申 2월에 주군에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여 전야(田野)를 개척하며 또 백성들이 금은주옥(今銀珠玉)을 쓰는 것을 금지하다.
■ 11년 乙酉에 한재(旱災)로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옮겨서 기민을 구제하다.
■ 12년 丙戌에 압독(押督)이 배반하거늘 쳐서 평정하고 그 무리를 남쪽 땅에 옮기다.

 

▶일성왕릉의 옛모습
일성왕릉은 오랜 세월 풍우에 의하여 잔디가 유실되고 축대가 부실해졌을뿐만 아니라 왕릉에 진입로가 없어 릉 수호 및 재물을 운반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전달하고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이 숭덕전 방문시 숭덕전 참봉 및 박씨대종친회에서는 관계당국에 수차례에 걸져 정비를 촉구하여 2002년초 노식(魯植) 前 殿參奉이 고유제를 봉행하고, 동욱 前 참봉이 명예 현장감독으로서 진입로를 확포장하고 축대를 축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성왕릉 참봉 춘호(春鎬)
당시 진입로 포장은 우리나라 최초 황토 시멘트 공법이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