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 : 충헌공
12중조 略史..... 충헌공파 편
경모재 전경(경남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⓵충헌공을 비롯한 아드님 손자 3세조 제단. ⓶경모재 본당, ⓷ 청년회 사무실. ⓸ 충헌공의 증손 대제학공 윤문 이하 묘역
밀성박씨는 신라 말 경명왕의 적장자인 휘 언침(시조30세)이 밀양의 성주인 밀성대군으로 봉작 되었기에 그 자손의 본관을 밀성 또는 밀양으로 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번성하여 파계를 형성하고, 밀성(밀양)박씨 대종회는 12중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12중조의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 1742년(영조18) 임술년에 인간(印刊)된 밀성박씨연계대보(통칭 임술년보)에 수록된 ‘密城朴氏 大君之后 12中祖 世系分派之圖’가 처음 등장한다. 곧 12중조를 연계해서 세대를 표기한 창시보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후손들은 12중조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각 종파 종회에 중조에 대한 행록과 세계를 소개할 수 있도록 약사(略史)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한바 있어 이번호부터는 ‘12중조 약사’를 연재해보고자 한다. 연재 순서는 무순으로 이번호에는 충헌공파에 대해 알아본다.
충헌공파(忠憲公派) 淵源
경모재 후원(後園)에 마련된 충헌공을 비롯한 3세조 제향광경(음10.3)
충헌공은 密城大君(彦침)의 13世支孫(시조 42世孫)으로 상계를 보면 밀성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9世孫) 太師公 휘 언부(彦孚)는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하였으며 밀성부원군으로 피봉 되었다.
태사공께서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는 효신(孝臣) 차는 의신(義臣)이다. 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이다. 고려주석(高麗柱石)이라 부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필 넉자를 하사 했다. 유지는 경북 청도군 풍각 화산에 있다고 하나 확증이 없다. 태사공의 둘째아들 諱 의신(義臣)은 당대의 文章家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내셨다.
의신의 장자 원(元)은 사문진사공파 파조이고 차자 윤(允)은 호연(浩然), 효연(皛然)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호연(浩然)의 현손 중미(中美)는 밀직부원군파조, 차자 효연(皛然)은 충헌공의 조부가 된다.
부친의 휘(諱)는 지영(之塋)이며 고려 고종조에 정시 갑과에 합격하였으나 뜻이 청고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해동시선(海東詩仙)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모친은 영양이씨(永陽李氏)이다.
휘는 척(陟)으로 고려조에 내부시승(內附侍丞)에 이르고 순충동덕찬화공신 삼중대광(純忠同德贊化功臣 三重大匡)에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해졌으며, 추은(推恩)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은총이 더하여지고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다.
사패지(賜牌旨)를 하사받으니 옛 밀주(密州) 수산현(守山縣 : 현 밀양시하남읍)에 있으며 자손이 세세로 계승하여 녹을 받아 왔다. 충선왕(忠宣王)이 태자일 때 정가신 ․ 민지 등과 함께 원(元)나라에 가서 삼년을 지낼제 공(公)도 함께 수행하여 김심과 더불어 심양(瀋陽)에서 높이 뫼시는데 힘쓰고 충선왕을 모시고 돌아와서 즉위하였으나 왕유소와 송방용이 정사를 마음대로 전횡하므로 공(公)이 의논하여 이들을 주살하니 이에 비로소 충선이 국정을 전담하게 되어 조야가 서로 가까워지고 태평하게 되었다.
충헌공파 세계(世系)
경모재 뒤 선영 묘원(⓵ 대제학공 휘 윤문 묘소, ⓶대제학공의 4남 정언공 제단, ⓷ 5남 참찬공 묘소)
충헌공은 부인 아림군부인(鵝林君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사이에 아들 성진(成進)을 낳으니 문과에 올라 조현대부(朝顯大夫)로 흥위위(興威衛) 정용장군(精勇將軍)에 협찬공신(協贊功臣)으로 황증문하평리(皇贈門下評理 종2품)에 이르렀다. 특히 고려 충렬왕 6년 군사 25,000명을 거느리고 왜적을 정벌 한 일은 고려사와 밀주구지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손자 판전교시사의 휘는 원(原)으로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벼슬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고 규의선력공신(揆儀宣力功臣)으로 밀성군에 봉해지고, 슬하에 아들 윤겸(允謙), 윤문(允文), 윤무(允武)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 윤겸(允謙)은 중랑장(中郞將)으로 아들(휘 連), 손자(휘 강)에 이르러 무후(无后)이고 차남 휘 윤문(允文)은 밀주의 풍각화산(현 청도군 풍각면 화산) 본가에서 출생하여 충숙왕 원년(1314년)에 급제하여 삼중대광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충목왕 원년(1345년) 문사(文士) 38명을 선발하여 날짜를 바꾸어가며 시독(侍讀) 할 때 공(公)은 기거랑(起居郞, 中書門下省에 속한 관직의 하나. 임금의 일상생활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등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보는 종5품의 관료)으로서 주참(注叅)하여 저술(著述)하였고, 특히 문장이 뛰어나 저술(著述)한 문적(文籍)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렸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부인 해양군부인 광산김씨는 첨의정승으로 치사(致仕)하고 시호(諡號)가 문정(文正)인 태현(台鉉)의 따님이다. 부도를 수행하고 시부모(媤父母)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효(友孝)하고 자손을 골고루 화애(和愛)하고 자비심(慈悲心)이 노비(奴婢)에 까지 이르고 의복(衣服), 음식(飮食)에까지 두루 돌아가게 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니 대광공(大匡) 公은 호례군자(好禮君子)이고 부인(夫人) 또한 예절(禮節)의 여자교훈(女子敎訓)으로 칭송받았다. 슬하에 아들 6명을 두니 세칭 육남대가라 불러지며 크게 번성하였다.
삼남 윤무(允武)는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제학에 이르렀으나 이 또한 손자대에 이르러 세계(世系) 이어지지 않았다.
대제학공 윤문(允文)의 장남은 밀양(密陽)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고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로 밀산군(密山君)에 봉작(封爵)되고, 차남(次男)은 대양(大陽)으로 과거에 올라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삼중대광전법판서(三重大匡典法判書)로 익조공신(翊祚功臣)의 밀천군(密川君)으로 봉작(封爵)되고 3남(三男) 소양(昭陽)은 진사로서 지절(志節)이 크고 굳세어 성균관 진사(進士)시험 이후로는 영달을 멀리하고 학문을 탐구하며 중국천하(中國天下)를 장유(壯遊)하였고, 4남(四男)은 삼양(三陽)으로 과거에 올라 정언(正言)에 이르렀고, 오남(五男) 계양(啓陽)은 진사시험(進士試驗)에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동년에 급제하여 관직이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이고, 6남(六男) 재양(載陽)은 장사랑(將仕郞)으로 관직이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이르러 이들 6형제가 가문을 크게 번성시켰다.
충헌공의 세계는 이들 6형제에서 또 각기 분파되어 크게 벌족하여 이번호에서는 6파의 파조까지 소개하고 다음기회에 파조별 약사를 통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숭의재-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천남리
뒤편에 판서공의 제단이 보인다.
○ 판서공(判書公) 휘 밀양(密陽)
공의 호(號)는 낙촌(駱村)이고 휘가 밀양(密陽)이니, 고려 충정왕(1349~1351)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법판서(典法判書)와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하였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선생과 교류하며 주고받은 시문(時文)이 전해진다. 경기 여주군 대신면 천남리에 숭의재[崇義齊]를 서기 1958년에 전국에 산재한 종친(宗親)들이 표성(表誠)하여 숭의재를 건립 하였다.또한 뒤뜰에 단비를 설단(設壇)하고 음력 10월 초 정일(丁日)에 시향을 지내고 있다.
○ 대제학공(大提學公) 휘 대양(大陽)
화산재- 경북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 화산
좌측 대제학공 제단
공(公)의 휘는 대양(大陽)으로 고려조 익조공신(翊祚功臣)으로 중대광(重大匡, 고려 시대, 從一品의 문산계)에 봉익대부(奉翊大夫)이고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올라 밀천군(密川君)에 봉해졌다.
익조공신(翊祚功臣)에 오른 것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공로이다. 그 사적이 고려 공민왕 31년(1362)에 그 기록이 전해지고, 익재 이제현 선생의 문집을 상고하면 공이 1358년경 호남의 안렴사[按廉使,지방 장관의 하나. 1276(충렬왕 2)년에 안찰사(按察使)를 개칭)]로 떠날 때 송별한 시에 이르면 남원부사로 있었던 손자를 부탁하는 내용이 있다. 또 서연(書筵)의 친구라고 했으니 익재 선생과 서연(書筵,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 같이 했던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다. 부인 군부인 남양홍씨이다. 후손들이 대대로 밀양에서 살았고 묘소는 이웃의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에 있어 이미 재실을 화산(華山)에 세움으로서 해마다 자손들이 모여서 제수를 갖추고 닦음의 장소로 하였으나 항상 公의 묘소를 실전하여 추모함을 부칠곳 없어 통탄하다가 1962년에 자손들이 서로 더불어 결의하여 화산재(華山齋) 뒤뜰에 제단을 설치하여 군부인 남양홍씨와 함께 제향을 음력 10월 4일 올린다.
○진사공 휘 소양(昭陽)
문장이 매우 뛰어나고 성정이 기개가 넘쳤다.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고려 말의 정치적인 혼란을 보고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들어가 산남염방사([山南廉訪司)의 직책을 얻어 경사를 왕래 하였다.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벼슬하지 말라 하고는 고려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서 돌아가시자 남긴 옷과 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어머니는 고려 시중인 문정공 김태현(金台鉉)의 따님인데 지체가 높고 법도가 한 시대의 으뜸이 된 명문이라 김씨가 생장할 때 익혀 배운 습성으로 아들을 훈계하는 방도를 세웠으니 하물며 대광공의 엄격 함 에서이다. 해양군부인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부인 진천송씨는 홍무 갑인(洪武 甲寅, 1374)가을에 돌아가셨으니 곧 공의 상복입기를 끝낸 후 연월일은 알 수 없으나 중국에 들어가 벼슬을 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이 일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집(輯)에 보인다. 향사일은 경모재 향사 다음첫 일요일이다. 밀양시 단장면 사연리에 진모재가 있다.
○정언공 휘 삼양(三陽)
휘는 삼양(三陽)으로 고려조에 벼슬은 정언사이다. 충목왕조에서 보문각대제학에 이르렀던 휘 윤문(允文)의 넷째 아들이다. 선대의 묘소가 밀주 수산지방에 많이 있는지라 부군의 의관(衣冠)과 신발의 간직함도 또한 빛나는 할아버지와 빛나는 아버지의 무덤 곁에 있었을 것이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덤의 지역(地域)을 분별(分別)하여 지점(指點)하기 어려우니 슬픔만 일으킬 뿐이라 눈여겨보아도 증빙(證憑)할 수 없으니 성손(姓孫)의 한스러움을 마땅히 간직함이 어떠하다 하리요 매년 봄비와 가을서리에 두렵고 처참(悽慘)한 마음에 조심스럽고 머뭇거릴 따름이라 단소(壇所)를 설치하자는 말들이 일어나 의론(議論)하는 일가들의 진실한 한결같은 밝은 마음은 둘이 있을 수 없었다.
이에 1982년 봄에 아버지 대제학공의 묘 아래 단소를 마련하고 향화(香火)를 받들어 오다 단비가 퇴락하여 지난 2014년 7월 개수(改竪)하였다. 향(享) 음 10월 3일.
○참찬공 휘 계양(啓陽)
사효재-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
공의 자(字)는 계신(季信)이요 일휘는 돈지(敦之 ) 초명은 계양(啓陽)이다. 고려 삼중대광 보문각 대제학 (高麗 三重大匡, 寶文閣 大提學) 휘 윤문(允文)의 자(子) 육형제중 5남으로 1342년 1월 6일(충혜왕4) 송도(개성) 건천리 본가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1360년(공민왕10)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이해 10월 25일에 책문으로서 신경동당(新京東堂) 병과(丙科) 5인에 급제하였다. 이 때 공(公)의 나이 19세이다.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이 날 을과(乙科) 3인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24세였고. 목화씨로 유명한 고려 충신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도 병과(丙科)7인에 같이 급제하였는데 나이는 30세였다.1362년 5월 문예부승(文睿府丞)을 제배(除拜)하고 이듬해 5월 승봉랑(承奉郞), 전의주부(典儀主簿), 고공좌랑(考功佐郞), 예의좌랑(禮儀佐郞)으로 옮겼는데 한 결 같이 사람의 도량과 재능의 이룸을 보였다.
임금이 현용청(現用廳)을 설치하고저 할 때 적색소경[政色小卿,무신 정권 때 정방(政房)에 ]둔 정색승선(政色承宣) 중 사품 이하의 관원)]에 명하였고, 1365년(乙巳) 7월 군부좌랑(軍簿左郞), 1366년 12월 예문응교(藝文應敎) 지제교(知製敎), 1367 12월 군부정랑(軍簿正郞), 예문지제교(藝文知製敎), 무신(戊申)12월에 봉선대부(奉善大夫) 내서사인(內書舍人) 지제교(知製敎), 기유(己酉)12월에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승진했는데 다른 직책은 전과 같았다. 홍무(洪武)신해(辛亥) 12월에 비서감(秘書監)으로 승진하니 품계는 중정대부(中正大夫)였다.임금의 귀염을 받던 홍윤(洪倫)이 원수진 사람으로부터 많은 재물을 받아서 임금의 측근들에 차차 젖어들게 하여 公으로서는 닦을 수 없는 명예(名譽)라 산과 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홍륜이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후 밝게 설원(雪寃)되었다.
무진(戊辰)(1388) 겨울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사신(使臣)이 되어 경사(京師-명나라 서울)에 가면서 공을 압물관(押物官)으로 삼아서 경사에 갔는데 관소(館所)에 대우가 특별하고 온전했다. 국초(國初)에 왜구(倭寇)가 아직까지 날뛰어 바닷가를 노략질 하므로 태조(太祖)께서 일본에 공을 통신사(通信使)를 보냈다. 일본의 대장군(大將軍)과 대내전(大內殿)이 공의 풍체가 잘생긴 것을 보고는 공의 말을 간절하게 들으면서 매우 존경을 표했다.
대내전이 대장군에게 호령을 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왜구를 토벌하라고 청하여 오백 여명을 참수(斬首)하기에 이르렀다. 건문(建文) 기묘(己卯, 1399년) 5월초5일에 복명(復命)하니 인덕전(仁德殿-왕)께서 매우 기뻐하여 공(公)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전중(判殿中)으로 발탁하니 특별한 대우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발호(跋扈)하는 일이 없어 연해(沿海)에 백성들이 전처럼 안도(安堵)하며 살 수 있었다.1399년 2월에 판봉상(判奉常) 보문각직제사(寶文閣直提事), 이듬해 7월에는 가정대부(嘉靖大夫)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보문각학사 겸 판전의사사(寶文閣學士兼判典醫寺使), 1402년 4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상서(刑曹尙書) 5월에는 승추부(承樞府)에 들어가 가정대부 제학 겸 판군자감사(提學兼判軍資監事)가 되었다.
9월에 공안부윤(恭安府尹) 수문전제학 겸 판군자감사(修文殿提學兼判軍資監事), 9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1411년(辛卯,태종11) 8월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내고 1422년(영락 壬寅)에 졸하였다.
공(公)의 효성과 충신(忠信)은 천성에서 나와 어버이를 봉양하고 여묘(廬墓)를 살면서 상제(禮制)를 극진히 마쳐 효행으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공의 묘소는 아버지 대제학공 아래 모셔져 있고 6형제중 유일하게 유택이 보존되어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에 사효재(思孝齋)가 있어 후손들이 모여 종사를 논의한다. (享 음 10.3)
○추밀원사공 휘 재양(載陽)
추밀원사공 제단과 재실 반월정(半月亭,경남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
공(公)의 휘는 재양(載陽)으로 1344년 11월 12일에 송경건천(宋京乾川)의 본가[本家]에서 대제학공(휘 윤문)의 아들 6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출생부터 기절이 맑고 높아 영명한 재질로서 학문이 깊고 깊은 경지에 나가더니 신축 1361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병란을 피하여 밀양에 와서 충심으로 봉양하다가 갑인 1374년에 상(喪)을 당하여 형인 참찬공과 더불어 묘소(墓所)곁에서 시묘 살이를 같이 할 적에 피눈물로 삼년동안 지극히 슬퍼하니 엷은 풍속(風俗)을 깨우치고 무너진 풍조를 일으킴이 많았다. 벼슬은 장사랑을 거쳐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이르렀다. 부인은 밀성군부인 손씨(孫)]이니 종흥(鍾興)의 녀(女)이다.
공의 묘소는 아쉽게도 실전하여 다 같이 의논하여 장차 흙을 쌓고 단을 세우기 위해 공의 6대손 관재홍문관 교리의 묘역인 상당동(上堂洞) 반월정 우측 터에 돌을 갈아서 단을 세워 경모재 향사 다음날 첫 일요일에 향화(香火)를 받들고 있다.
집성촌
참찬공 후손의 집성촌 전경-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
충헌공은 밀주(밀양) 사람으로 대대로 밀양을 근거지로 생활하다 고려 말 대제학공이 궁궐이 있는 개성 건천에서 자리하여 아들 6형제의 후손들은 별슬 임지를 따라 전국으로 산재하기에 이른다.
장자인 판서공(휘 밀양)의 후손들은 경기 여주를 중심으로 경기 광주, 충북 옥천, 전남 장성, 경남 하동, 경북 경주 등에 산재해 있다.
차자인 대제학공(휘 대양)의 후손들은 경북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에서 다시 경기 남양주, 고양시 원당, 일산, 안성, 경남 마산. 삼자인 정언공 휘 삼양(三陽)은 경남 마산, 창녕, 고성. 넷째 진사공 휘 소양(昭陽)은 경남 밀양시 단장면, 다섯째 참찬공 휘 계양(啓陽)은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에 큰 집성촌을 이루고, 여섯째 추밀원사공 휘 재양(載陽)의 후손은 경남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에 집성촌을 이루는 등 충헌공의 후손들은 전국적으로 약 5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