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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陽 소파 소개

“ 육양소개 ”




육양(六陽)은 충헌공 휘 척(陟)의 5세로 밀양(密陽), 대양(大陽), 소양(紹陽), 삼양(三陽), 계양(啓陽), 재양(載陽) 6형제를 일컬는다.


육양(六陽)의 증조는 성진(成進)이니 정용장군(精勇將軍)이였는데 명나라 황제는 문하평리 승(門下評理 丞)을 증직하였고 충렬왕의 명에 따라 군사를 거느려 일본을 정벌하러 갔으나 싸움에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고려사에 나타남) 할아버지는 원(原)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이며 아버지는 삼중대광 보문각 대제학(三重大匡 寶問閣 大提學)공 휘 윤문(允文)이시고 어머니는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으로 광산 김씨이며 첨의정승 쾌헌 문정공 태현(僉議政承 快軒 文正公 台鉉)의 여(女)로 여중군자행실이 있었다.

육양(六陽)중 첫째인 휘 밀양(密陽)공의 호(號)는 낙촌(駱村)이다.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법판서(典法判書)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하였고 밀산군(密山君)과 봉순대부(奉順大夫)로 봉(封)하였다. 여주군 대신면 천남리에 숭의재(崇義齊)를 서기 1958년에 전국에 산재한 종친(宗親)들이 표성(表誠)하여 숭의재를 건립하였다. 또한 뒤에 밀산군(密山君)에 단비를 설단(設壇)하고 음력 10월 초 정일(丁日)에 시향을 지내고 있다.
휘 밀양은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珠)와 목은 이색(牧隱 李穡)등과 도의로서 교류하였다. 배위(配位)는 문화류씨이니 첨의정승 찬성시녕군 장경공 돈(僉議政承 贊成始寧君 章敬公 墩)의 여(女)로 공의 훌륭한 배필이었다. 2남 4녀(二男四女)를 낳으니 맏이는 경의(敬義)이며 중낭장(中郎將)으로 시호가 충민공이고 다음은 경인(敬仁)이니 전서 벼슬을 하였다.

대제학공 휘 대양(大陽)공은 6형제 중 둘째 아드님으로 고려 익조공신 중대광 진현관 대제학(高麗 翊朝功臣 重大匡 進賢官 大提學)으로 밀천군(密川君)이시다.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중대광 익산군(重大匡 益山君) 운수(云遂)의 따님이다. 단비(壇碑)는 화산재(華山齋) 경내에 있으며 위치는 경북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에 있다. 제향일은 음력 10월 4일이다.
뒤 화산에는 6세손 휘 응(膺) 영락사마판사재(永樂司馬 判司宰監事) 배위 진주하씨묘(配位 晋州 河氏 墓)와 7세손 휘 겸형(謙亨) 용기시위사좌령( 龍旗侍衛司左領) 배위 문화유씨(文化柳氏)의 묘가 있다.

진사공 휘 소양(紹陽)공은 6형제 중 3남으로 소양(少陽)이라고도 한다. 자(字)는 중강(仲剛)이며 문장이 매우 뛰어나고 성정이 기개가 넘쳤다.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로 고려 말의 정치적인 혼란을 보고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들어가 산남염방사(山南廉訪司)의 직책을 얻어 경사를 왕래 하였다.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벼슬하지 말라 하고는 고려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서 돌아가시자, 남긴 옷과 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배위(配位)은 진천 송씨(鎭川 宋氏)로 아버지는 참의(參議)를 지낸 우(愚)이고 조부는 서령(署令)을 지낸 임(琳)이며 증조는 첨의(僉議) 유신(由信)이다.
재실은 진모재(進慕齋)로 경남 밀양시 단장면 사연리에 위치해 있으며 제향일은 경모재 후 일요일이다.

휘 삼양(三陽)공은 6형제 중 4남으로 고려조에 정언사(正言事)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실전되어 알 수 없고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있는 경모재(景慕齋)에서 음력 10월 3일에 시향을 지내고 있다.

참찬공(정헌대부) 휘 계양(啓陽)공은 6형제 중 5남으로 자(字)는 계신(季信)이요 일휘(一諱)는 돈지(敦之)이다. 임오(壬午) 1342년(충혜왕4년) 정월 초6일에 송도(개성) 건천리 본가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는데 기개와 도량이 청수(淸秀) 하였다.
공의 심성 함양(涵養)과 학업의 성취는 진실로 타인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경자(庚子) 1360년(공민왕10년)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이해 10월 25일에 책문으로서 신경동당(新京東堂) 병과(丙科) 7인에 급제하였다. 이때 공(公)의 나이 19세이다.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이 날 을과(乙科) 3인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24세였고. 목화씨로 유명한 고려 충신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도 병과(丙科) 7인에 같이 급제하였는데 나이는 30세였다. 임인(壬寅) 1362년 5월 문예부승(文睿府丞)을 제배(除拜)하고 1363년 5월 승봉랑(承奉郞)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신묘(辛卯) 8월 정헌대부(正憲大夫) 참찬의정부사(檢校叅贊議政府事)를 제수하였다. 공의 효성과 충신(忠信)은 천성에서 나와 어버이를 봉양하고 여묘(廬墓)를 살면서 상제(禮制)를 극진히 마쳤다.
공은 임인(壬寅) 9월 초2일에 밀양부(密陽府) 쌍계서사(雙溪書舍)에서 돌아가시어 윤 12월 초2일 밀양부 서수산(西壽山) 귀명동(貴明同) 선군(先君)의 묘(墓)에 부 하였으니 공(公)의 수(壽) 81세였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로 목사(牧使) 만룡(萬龍)의 따님인데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사제(思齊)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이다.
시향은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경모재(景慕齋)에서 음력 10월 3일에 지낸다.

장사랑공 휘 재양(載陽)공은 6형제 중 막내로 자(字)는 경명(景明)이고 갑신(甲申) 1344년 11월 12일 송도 건천리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병란을 피해 밀양에 와서 충심으로 봉양하다가 갑인년에 상을 당하여 형인 참찬공(叅贊公)과 더불어 시묘살이를 같이 할 적에 피눈물로 삼년 동안 지극히 슬퍼하며 엷은 풍속(風俗)을 깨우치니 무너진 풍조(風潮)를 일으킴이 많았다. 벼슬은 장사랑(將仕郞)을 거처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밀성군부인 밀성 손씨(密城 孫氏)이니 종흥(鐘興)의 여(女)이다. 조부는 인회(仁會), 증조는 봉사(奉事)를 지낸 태주(泰周)이다. 1남을 출생하니 국검(國儉)이고 공조좌랑이요 손자는 3남이니 소(蘇)는 전언관(宣傳官), 번(番)은 문림랑(文林郎), 끝은 진(秦)이다. 공의 묘소는 밀양 고자산 옛터에 있다고 전하나 실전 하였다.
제단은 공의 6대손 민준(民俊) 홍문관 교리(弘文官 校理)의 묘역인 상당동 반월정(半月亭) 우측에 있으며 경모재 후 일요일에 시향을 올리고 있다.